소나무와 한국인

생활 속 소나무

관리자 | 2018.09.19 | hit. 15

일월오봉도 병풍(日月五峯圖 屛風) / 작자미상 / 조선 19세기 / 196.5 X 366.6 / 국립고궁박물관

흔히 소나무에 대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현을 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나무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며 함께하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출생을 알리는 징표로 대문에 금줄을 쳐서 외부 사람의 출입을 막고 정결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 때 출산한 아기의 성별을 알리기 위해 아들이면 붉은 고추를 숯덩이와 함께 금줄에 끼우고, 여자이면 솔가지를 끼웠다고 한다. 심지어 장을 담글 때도 장항아리에 솔가지와 숯을 꽂은 금줄을 친다. 이것은 모두 벽사와 정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소나무의 잎과 가지는 서민들이 한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는 좋은 뗄 감이 되었으며, 오뉴월 보릿고개 시절에는 훌륭한 먹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난초나 국화처럼 어느 특정 계층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양반, 서민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에서 골고루 사랑을 받은 것이다.
문헌기록을 통해서 소나무가 일찍부터 건축물의 부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 시조 주몽이 부여를 떠나면서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기둥 아래(七稜石上松下) 부러진 칼 한쪽을 묻어두는데, 훗날 태어난 아들 유리는 자기 집 소나무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쪽을 찾아내 주몽을 이어 임금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시대 목조건축물 중 현존하는 것은 없지만, 소나무가 건축물의 기둥으로 쓰였다는 최초의 기록인 것이다. 이는 그만큼 소나무가 널리 자라고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나무가 득세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안도에서 전라도를 잇는 한반도 서부지역은 급격히 산림이 파괴되어 갔고, 소나무만 남게 되어 그 사용빈도가 높아진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시대가 되면 왕실 뿐 아니라 백성들도 각처 소나무 숲을 보호하기 위해 금송계(禁松契)를 자체적으로 결성하였다. 일반 백성들도 자체적으로 이러한 모임을 결성하였던 것을 보면, 소나무가 일상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목재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죽은 자를 위한 공간에 소나무를 심었던 기록은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장례의 마무리 절차로 "무덤 둘레에 송백을 심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왕실의 능역에도 소나무를 심었는데, 「태종실록』에 보면, "능침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없는 것은 예전 법이 아니다. 잡풀을 베어버리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두루 심어라"고 하였다. 소나무를 심어서 길지(吉地)를 만들고자 했던 것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소나무를 축복의 나무, 상서로운 길상의 나무로 믿어왔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일상생활용품 가운데에도 소나무가 문양으로 등장하는 예가 많이 남아있다. 붓을 꽂아 보관하는 필통은 나무, 대나무, 자기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필통에 시문된 소나무는 다른 상서로운 동물과 함께 짝을 이루며 등장한다.


도자기 가운데 특히 청화백자에서 소나무는 회화의 한 장면처럼 산수 속의 소나무로 그려지기도 하였고, 매화나 대나무와 함께 문인화처럼 그려지기도 하였으며, 사슴이나 학과 같이 장수를 의미하는 장식적인 문양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또한 팔걸이, 찬합 등의 생활용품에 소나무 모양으로 투각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반닫이, 찬탁 등 일상생활에 쓰였던 목가 구 가운데에도 재질이 소나무인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여성들이 착용했던 장신구에도 소나무는 등장한다. 머리 단장할 때 쓰인 빗치개, 혼례를 올릴 때 신부가 드리는 고이댕기 등에도 소나무는 부정(不淨)한 것을 씻어내는 의미에서 조각되고 수놓아졌던 것이다.


- 2006년 발행 국립 춘천박물관<소나무와 한국인>특별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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